지난 주말 뒤늦게 이상한 박사 이야기를 보았다.

이것보다 더 이상할 수 있을까?

영화는 대체 의학과 컬트교, 동양철학, 사이비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말도 안 되는 설정과 당혹스러운 전개를 펼쳐보였다
이 영화를 보고 스트레인지는 역시 철학박사였다는 감탄이 나왔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은 주요 갈등 해소 장면이었던 도르마무와 거래를 의아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님 말고!  


출처는 사진 속에-


스트레인지는 적어도 철학을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기 위한 도구로 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니체를 열심히 공부한 덕에 도르마무와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다. 그 성공의 비결에는 바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영원회귀란 무엇일까?
니체가 말하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des Glichen)는 크게 세가지의 의미로 이해된다.



1) 생기 존재론
영원회귀에서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시간은 그리스도교적 시간관이나 역사철학적 시간관과는 다른 시간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시작점과 끝이 없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어떤 목적도 없다. 이러한 시간관에서 존재들은 생성과 유전을 거듭하며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과정 안에 있다. 세실리우스가 닥터에게 도르마무는 "beyond time"에 있다고 말하는 순간 닥터는 묘책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순차적 시간관을 벗어나 계속되며 멈추지 않는 시간 속으로 도르마무를 만나러 간다.



2) 순간의 영원성

"언니네 이발관 - 순간을 믿어요" 순간을 믿어요? (...)



매 순간이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각각의 순간들일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우리가 놓여있는 자리는 매 순간으로 이 순간 속에 겹쳐져 있는 영영원의 무게는 엄청난 집중성, 긴장, 결집성의 총체가 된다. 니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흐르는 순간의 각각이 가지고 있는 집중성과 결집성을 잘 드러내 보이고자 이러한 설명을 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도루마무와에게 수 차례 "거래를 하러 왔다"라고 말하고 수 차례 거절당하고 파괴당한다. 매 순간 순간 그는 고통을 겪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읃어 맞고 쥐어 터지고 찔리고 파괴당하고... 하지만 이 순간이 갖는 힘은 찰나로 지나가 버리는 바가 아니다.



3) 니힐리즘의 완성된 극복
우리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계속해서 도르마무에게 터무니 없는 거래를 제안하고 거절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이게 뭐야...'하고 실망할 수 있다. 으앙쥬금ㅠ의 반복 그리고 또 반복이기 때문이다. 아마 영화 내내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라는 장면이 반복된다면 그 영화를 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수천번, 수만번 그리고 팔조오억만번 같은 거래와 사기 그리고 뒷통수 그리고 죽음 등의 결말이 반복된다면, 그리고 헛수고인 노력과 끔살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우리는 극단적인 니힐리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어차피 안 될 거 왜 해야하지?' 라거나 '지겹다.'와 같은 생각은 그러한 허무주의적 사고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삶 전체가 마치 도르마무와 거래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해보자. 요태까지 그래왔고 아패로도 계속....

니힐리즘에 빠진 오늘날의 청년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죽어도 고통은 무한히 계속적 반복된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니체는 니힐리즘의 극복의 출발점을 우리의 세계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찾는다. 니체는 살아가기 위해 감수해야한다고 여겨지는 노력과 고통이 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이 드러나 버릴 때 인간이 빠지는 깊은 심연의 무게, 딱 그 무게 만큼의 니힐(무, 허무)를 수용해야한다고 말한다.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원회귀를 니힐의 대립으로 설정하면 더 이상 인간은 허무를 부정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때 수용은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면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태도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환영과 수수께끼의 이야기에서의 마치 뱀의 모가지를 무는 것처럼, 인간은 니힐이 갖는 그 최대의 중량을 기꺼이 물어뜯고 맛보고 씹고 즐기고 소화하는 인간이 된다. 이런 인간은 최대의 니힐리무스를 완전한 긍정으로 뒤집어버리는 힘을 갖게 된다. 니체는 이러한 힘을 가진 인간을 초인(Übermensch)이라고 말했다.



닥터는 말 그대로 초인이 되어 도르마무와의 거래에 이기고 만다. 사실 니체 이야기가 없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이 느껴진다. 인정. 그리고 내 글은 재미와 감동 의미 모두 잃어버렸다...

(...)

앞으로 그가 어떤 또 다른 철학적 아이디어를 통해 묘책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는 사실 끼워 맞추기도 저게 처음이자 마지막 아닐까 싶다.

참고자료 및 출처 ; 김교수님의 니체 수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뇌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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