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도덕과 시간의 질서
문학은 온갖 유형의 에로틱한 심리적 갈등을 다루지만 외적인 갈등 소재는 가장 단순한 것도 너무 뻔해서인지 등한시한다. 이것은 선점현상인데, 어떤 사랑스런 여인이 우리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까닭은 그 어떤 적대감이나 내적인 장벽, 또는 너무나 쌀쌀맞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배척하는 기존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실은 시간적 질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감정의 위계질서 탓으로 돌리고 싶어한다. 이런 선점상태에는 선택이나 결단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완전히 우연한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는 자유의 요청과는 전혀 모순된 듯이 보인다. 상품생산의 무정부사회로부터 치유된 사회에서조차 어떤 순서로 사람을 만나게 되는가에 대한 규칙 같은 것이 존재하지는 힘들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즉 사람 만나는 규칙을 조정하는 것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침해로 여겨질 것이다. 그 때문에 우연이 앞선다는 논거에는 나름대로 강력한 근거가 있다. 누군가가 새로운 사람을 선호한다면 그는 함께 공유해 온 과거를 무로 만들고 경험을 지워버림으로써 옛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다.
시간의 불가역성은 도덕의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추상적 시간 자체만큼이나 신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추상적 시간 속에 설정되어 있는 배타성은 그 고유한 개념에 따라 밀폐된 집단의 배타적 지배로 결국에는 거대 산업 집단의 지배로 발전하게 된다. 새로운 여자가 나타나 결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최고의 소유물인 사랑과 부드러움을 단지 새롭다는 이유로_새로운 것은 옛것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인데_ 가로채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여심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감동적인 감정이 모든 온기와 포근함을 잃게 되어 서릿발이 내리게 되면 그것은 나중에 태어난 동생에 대한 형의 미움으로, 유색인종의 이주를 금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인 호주의 이민법에 의거해...(중략)... 파시즘의 행태로 곧장 나아간다. 이 경우 온기와 포근함은 폭탄처럼 산화하여 無로 화하고 만다.
니체가 이미 알고 있었듯이 모든 선한 사물들은 언젠가는 사악한 사물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부드러운 것들도 자신의 고유한 중력에 내맡겨질 경우 상상을 초월한 난폭성으로 발전할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출구를 제시해보려는 노력은 별 도움이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변증법적 진행이 작동할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치명적 계기를 거론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계기는 최초의 것이 갖고 있는 배타적 성격에 있다. 본원적인 관계는 단순한 직접성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바로 저 추상적 시간 질서를 전제한다. 역사적으로는 시간 개념 자체가 소유의 질서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소유욕을 시간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되돌릴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투영된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미래의 비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이로써 존재하는 것은 비로소 말 그대로 '소유'가 되며 바로 이런 경직성 속에서 다른 등가의 소유와 교환될 수 있는 기능적인 것이 된다.
일단 완전한 소유가 되면 사랑하는 연인은 이제 바라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랑 안에 있는 추상성은 배타성의 보완물, 즉 기만적으로 추상과는 반대되게 '이처럼 생생한 존재자에 찰싹 달라붙는 것'으로 나타나는 배타성의 보완물이다. 그러함 움켜쥠은 그 대상을 단순한 객체로 만들면서 손에서 빠져나간 물고기처럼 대상을 잃어버리게 되며 '내 사람'이라고 격하시킨 사람을 잃게 된다. 인간이 소유물이 아니라면 인간은 더 이상 교환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애정은 특수자로서의 개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 인격의 우상이나 소유의 투영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ㅇㄹ 사랑하면서 밀착되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특수자란 배타적...(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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