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는 자신이 살아있는 현대, 즉 20세기를 우울의 시대로 규정했다.

스스로를 포함하여 우울의 시대에서 우울할 수 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들을 위로하려고 아도르노는 책 한권을 썼다.

 

나는 나와 타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안 하지만, 단언만 하자면 오늘날의 시대를 광기의 시대로 규정하고 싶다.

우울한 세상에서 우울하지 않고 살기 어렵듯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사는 게 힘든 법이다.

 

왜 이 시대가 미쳤냐고? 그에 대한 증거는 많지만 열거하자니 미칠 지경이네...

평온하고 작은 내 블로그에 어울리는 소소한 증거로는 최근에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 조커를 들겠다.

조커의 세계적 인기는 제쳐두고서라도 조선 반도에서만의 광풍은 매해 10월 말 이태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빌런이 너무 매력적이라서 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 관객이 광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미친 자아의 조각을 캐릭터를 통해 투사했기 때문이리라.

 

한편 폭풍같은 11월을 마무리하면서 지난 주말에 우디 앨런의 이레셔널 맨(미친놈으로 번역해도 될듯)을 봤다.

우디 앨런 영화인지도 모르고 봤는데 보다보니 드는 기시감은 어쩔 수 없더라.

철학과 교수가 그렇지 뭐 싶다가도 역시 공포와 슬픔, 허무 그리고 분노를 겪고 나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광기밖에 없구나 싶었다.

나도 한 때는 미친놈에 어울리는 미친 사람으로 사는 게 좋다고 확신하기도 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살기 싫다. 하긴 누군들 그러겠냐만은. 그리고 누굴 탓하겠냐만은.

 

 

뭐 암튼 그러다 며칠 전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클립을 보고 확실히 20세기의 우디 앨런 영화와 21세기의 우디앨런 영화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느꼈다.

우디 앨런의 옛날 영화는 비현실적이고 작고 귀엽고 슬프다면 요즘 영화는 현실적이고 골 때리고 가슴 먹먹하다. 

우디 앨런 역시 우울의 시대에서 광기의 시대의 변이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아님 그도 그냥 미친 거다.

 

그렇다면 나는 이 미친 세상에서 뭘 남기면 좋을까 아님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글쎄 지금 당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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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미덕이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계획적인 케이가 살고 있었다

 

이봐 케이, 쉬엄쉬엄 하라구

이봐 케이, 너무 심각하게 골똘해 하지 말아

이봐 케이, 힘 좀 빼

 

날마다 시달리는 케이

 

되는대로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은 내팽겨쳐도

착실한 청년 케이를 한 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 되는대로 사는 나라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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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드보이를 십대 시절 두 번, 그리고 대학에 와서 다시 두 번 보았다.
철학 공부를 하기 전까지 나에게는 올드보이와 관련한 두 가지 의문이 있어왔다.

1. 왜 영화의 주인공은 우진이 아니라 오대수인가?

우진과 대수는 동창생(Old boy)임에도 불구하고 외관상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자, 이제 누가 올드보이지?


올드보이의 오대수의 이름을 오이디푸스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를 듣고(감독이 의도했는 지는 정확치 않다) 왜 영화의 주인공은 우진이 아니라 오대수일까? 하는 의문을 늘 갖고 있었다.
근친상간의 터부를 깨고 자신 스스로에게 벌을 가한다는 점에서는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는 닮아 있다. 그런데 누나와 사랑을 나누고 그녀의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평생 늙지도 않고 미성숙하게 살아간 이우진이 진정한 올드보이(Old boy)이자 오이디푸스에 더 가까운 인물이 아닌가?


2. 왜 이우진은 생의 의지를 상실하고, 오대수는 악착같이 생에 집착하여 살아남았는가?

복수는 건강에 좋다면서 왜 죽은 거야...

평생을 기획해 온 복수에 성공한 우진은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찾지 못하고 어린 시절 누나의 손을 놓아버린 장면과 겹치면서 스스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자살한다.

반면 자신이 잠자리를 함께한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딸임을 알고도 오대수는 이 사실을 미도에게만은 알리지 말아달라며 스스로의 혀를 뽑는다. 너희도 "다 알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우진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대수는 살아남고 심지어 사랑도 해내는 것 같아 보인다. 심지어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며 자신의 괴로운 기억을 지워달라 요청하면서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여생을 미도와 설산에서 보내는 듯한 암시를 남기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올라간다.


진실은 아이를 해치지만 어른으로 만든다.


이 두가지 의문은 니체의 오이디푸스 해석에 관한 수업을 듣다가 해소되었다.
1의 의문에 대한 답은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진정한 오이디푸스는 이우진에 가까우며, 니체가 생각하는 오이디푸스에 가까운 사람은 오대수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성인의 기준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였는지 여부에 둔다. 그런 점에서 오이디푸스 신화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미성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인물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결국 죽음을 통해 고통의 단절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 오이디푸스는 세상의 멸과 고통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불운이나 숙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꿋꿋히 살아가는 초인이다. 스스로의 두 눈을 뽑았지만 자신의 딸과 함께 황야를 돌아다닌 오이디푸스는 설산을 자신의 딸과 함께 바라보는 오대수와 더 닮아있는 것이다.

3. 여전히 남은 사소한 의문들 : 사적복수의 허용성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에 대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평가한다.
물론 오대수에게 벌어진 일이 100% 불운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대수가 친구에게 실없는 농담을 전하여 소문이 퍼지게 되어 결국 소문의 당사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 사건을 두고, 오대수의 행동을 잘한 짓은 아니지만 15년 간 갇힐 이유가 된다고 판단하기는 선뜻 어렵다. 이우진의 복수라는 코드는 영화가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던져지는 일차적인 물음으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윤리적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기능을 해낸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를 보고 있노라면 사적 복수는 적절한 수준을 정하기 어려우며, 성공하기도 어렵고 만족스럽지도 않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윤리관에 입각하지 않고서라도 올드보이의 이우진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만큼 오랜 기간 철저히 완벽한 복수를 기획하고 준비하며 실행하는 일은 쉽지 않고 굉장히 드물다.
대개 시간은 사람들을 망각하여 용서하게 하고, 삶은 너무 짧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일을 당하고 왠만하면 잊거나 고소하며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동창생들만의 소문은 오늘날 거의 존재하기 힘들다. 한국은 인구 대비 초고속망 보급율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지금 당장 터무니 없지만 자극적인 소문과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매체인 사진이나 동영상을 첨부한 글을 올리면 세상 사람들 거의 아무도 모르는 내 블로그일지라도 삽시간에 정보는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이런 뻘글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적절하게 복수해왔는가?
아니면 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볼까한다.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살아남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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